신작로 길섶에 이제 막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길 언덕 아담히 자리 잡은 시골 교회는 사람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하루 전에 추석을 보낸 10월의 하늘은 천고마비의 풍성함으로 황금빛 들녘을 빗어낸다. 조그만 마을 교회는 새 출발을 축복하는 동네 사람들로 가득하다. 빡빡머리 신랑은 결혼 특별휴가를 받은 상병 계급장의 스물 네 살 군인이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는 수줍은 많은 스무 살 아가씨다.
1971년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살의 아가씨는 4명의 자식과 9명의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 큰 사위는 의사이고, 둘째 사위는 은행원이고, 셋째 사위는 공항 기술자이고 막내 아들은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느니 자식 농사도 이만하면 잘 지었다.
추석 차례를 마치고 밥상 주변으로 온 식구가 둘려 앉는다. 젓가락이 산해진미 상공에서 목표물 선택을 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광학렌즈로 무장한 젓가락 눈이 맛있게 삶겨진 문어를 낚아채 입으로 가져간다. 멀찍이 앉아 있는 큰 형님은 소고기와 두부로 구수한 맛을 풍기는 탕국이 첫 번째 목표물이다. 형수는 아직도 부엌에서 갖은 음식을 담아내고 있다. 형수는 언제나처럼 남자들이 밥을 먹기 시작해도 자리에 앉지 않고 까만 비닐봉지에 갖가지 음식을 나누어 담는다. 그중 한 봉지는 내 몫이다. 올 추석에도 큰 형님댁 거실 풍경은 변함이 없다.
큰형과 형수는 라디오 펜팔이 맺어 준 운명의 만남이지만 하느님의 축복으로 우리 집에 내려온 천사였다. 펜팔로 알게 된 인연으로 큰형은 휴가 기간에 형수의 시골집으로 찾아갔고, 어떤 군인이 찾아 왔다는 소식에 큰형과 형수는 첫 대면을 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긴 머리 동그란 얼굴, 엷은 미소를 간직한 순박한 처녀에게 큰 형은 마음을 빼앗겼다. 형수 역시도 이목구비 뚜렷하고 늘씬하게 잘생긴 멋진 군인의 마음을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 만남 이후 형수도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데 우리 집의 첫 모습을 본 형수의 첫 느낌은 비통함이고 처량함이었다. 허름한 초가집 아래서 병들어 누워있는 노모에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 셋이 그을음 가득한 부엌에서 밥을 해 먹는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되돌아가고 싶었으나 가슴이 너무 아파 팔을 걷어붙인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형은 그날 바로 면 소재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자고 했고 얼떨결에 따라가서 찍은 사진이 약혼 사진이 되었다. 큰형은 형수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맏아들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의 이미지는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에 우리 집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병환으로 활동을 제대로 못 하시고 누나는 결혼하여 타지에 살고 있었다. 큰 형은 군대에 의무복무 중이고 둘째 형은 중학교 졸업 후 집에 있었고, 그리고 셋째 형이 초등학교 5학년 내가 7살이었다. 둘째 형이 땔감을 장만하고, 셋째 형이 밥을 하고, 나는 땟물 줄줄 흐르는 철부지였다.
큰형은 다시 부대로 복귀하고 가슴이 너무 아파 발길을 옮기지 못한 형수는 우리 집에 남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우리 집에 있는 형수는 동네 이웃들과 친인척들 눈에는 고마운 사람이고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못 살겠다 하고 돌아가 버리면 우야노‘ 노심초사하던 동네 사람들과 결혼한 누나는 큰형과 형수의 결혼을 서둘렀다. 우리 집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과 친인척들이 발 벗고 나섰다. 동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부대로 관보를 보내서 결혼휴가를 요청했고, 친척 형님은 신랑의 양복과 신부의 한복을 마련해주었다. 결혼식은 추석 다음 날 음력 8월16일 양력 10월4일 이었다. 결혼식 하루 전까지 큰형은 집으로 오지 않았다. 모두가 결혼식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결혼식 당일 낮 12시에 큰형이 왔다. 동네 사람들은 서둘렀다. 예식장은 윗동네
조그만 교회로 하고 주례는 관보를 보내주신 동네 아저씨가 맡았다. 죽장에 있는 시집간 누나도 황급히 넘어왔다.
결혼식은 소박 하다못해 초라했다. 그렇지만 동네 사람들이 보내주는 축하와 성원은 그 어떤 결혼식보다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라 약 1 km 떨어진 교회는 비포장 신작로를 걸어서 가야 했다. 새색시는 그 길을 가면서 새신랑의 손이 아니라 새까맣게 때가 낀 막내 시동생의 손을 잡고 걸었다. 까까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막내 시동생은 형수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놓지 않으려고 형수의 허리춤으로 바싹 붙어서 걸었다. 추석을 하루 지낸 10월 초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았을 텐데도 어린 시동생이 춥다고 응석하면 형수는 치마폭으로 시동생을 감싸 주었다. 8살 시동생은 형수에게서 엄마 같은 누나를 느끼고 있었다. 새색시는 가엾은 친동생을 대하듯 막내 시동생을 챙겼다. 새색시와 시동생과 그렇게 해서 ’데름과 아지매‘ 라는 호칭으로 한 식구가 되었다.
형수의 신혼생활은 고생의 시작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은 부대로 복귀하고 병든 노모와 철부지 시동생 셋을 데리고 시작한, 초가삼간 시집살이는 망막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처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짐이었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가는 힘은 오직 맏며느리라는 책임감과 시집간 여자는 그 집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시골 처녀의 순진함 그리고 가엾음에 뿌리치지 못하는 순박한 인정이었다.
형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막내 시동생을 살뜰히 챙겼다. 초등학교 2학년 봄 소풍 갈 때였다. 도시의 깔끔함과 세련미를 알고 있는 형수는 시동생에게 맛있는 도시락과 함께 반바지에 하얀 타이즈를 입혀서 소풍을 보내려 했고, 어린 시동생은 하얀 타이즈가 여자 옷 같다고 하면서 입지 않으려고 앙탈을 부렸다. 결국 타이즈를 입고 소풍을 다녀온 어린 시동생은 ’쪽팔려서 죽을 뻔했다‘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형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큰형이 제대하고 농사일을 시작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얼마 되지 않은 논밭과 산을 개간한 산전 일터에서 뙤악볕을 맞으며 허리를 펴지 못해도 가난을 물러가지 않았다. 형수의 곱디고운 손은 거칠어지고 백옥같던 하얀 얼굴이 검게 그을려도 초가집 부엌의 쌀통은 언제나 바닥이었고 가을 추수 마치고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봄이 오고 농번기가 시작되면 비료를 사거나 학비를 보내거나 씨앗을 산다거나 모든 일에 돈을 빌려야 했다. 금융기관이 아닌 돈은 5부 이자의 엄청난 고리 사채였다. 부모가 없는 고아는 그것도 빌리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도시에 나가 있는 셋째 형 고등학교 학비는 놓치지 않고 보냈다. 한번은 내가 약간의 잘못으로 옆집 누나에게 심하게 혼나고 있는 것은 본 형수는 시동생을 보호하려는 일념으로 옆집 누나와 결투를 벌인 일이 있었다. 형수의 막내 시동생 사랑은 그렇게 각별했다. 아랫마을 외사촌 형님이 형수님 이란 존칭을 하지 않는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외사촌 형님의 호통으로 큰형을 형님으로 존칭이 되었어도 형수님이란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 나이 환갑을 다 되어도 지금까지 형수에게마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형수에게 나는 여전히 철부지 막내 시동생이다.
형수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일어났다. 엊그제 새해를 시작한 아침이었다. 마을 공용전화를 받고 온 큰형님은 ’지금 당장 대구로 가자‘며 정신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구미 금성사에 근무하는 셋째 형이 위독하여 대구 동산병원에 있다고 염색공장 다니는 둘째 형이 다급히 전화했다. 한겨울 날벼락이었다. 얼마 전 금성사에 다니는 둘째 형은 회사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버스가 교통사고를 일으키면서 목 부위에 크게 다친 적은 있지만 잘 회복되어 성실히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의 위독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큰형님과 형수는 곧바로 대구로 나가고 나는 소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집에 남았다. 며칠 후 이른 아침에 마을 방송에서 나를 찾았다. 큰형님의 목소리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죽장 누나에게 연락할 길이 없으니 자전거 타고 가서 알리라는 말을 겨우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셋째 형은 그렇게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군대 안 가고 막내를 공부시키겠다며 방위산업체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형이었다. 금성사 기능직 취직으로 군 면제를 받고 큰형님을 기쁘게 했던 든든한 형이었다.
우리 집에서 누나 집까지는 꼭두방제를 넘어야 하는 13킬로의 비포장 길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온몸으로 전해오는 한겨울의 칼바람도 차갑지 않았다. 꼭두방제를 쏜살같이 내려가는 자전거가 울퉁불퉁 자갈길에서 불안하게 휘청이지만 무섭지가 않았다. 정신없이 달려온 자전거는 어느새 누나 집 마당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동생을 본 누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왔노? 무슨 일이고?” 결혼 후로 늘 친정 걱정에 노심초사하던 누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동생을 보고 불길한 짐작을 확인하려는 듯 급하게 다그쳤지만 나는 울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르고 울먹이는 소리로 ’은수 형이 죽었다‘라고 말을 하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형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누나는 그 자리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고 울음소리에 놀란 이웃들이 누나 집으로 몰려들었다. 누나와 자형은 모든 일을 그만두고 대구로 출발했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 후 큰형님과 형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큰형님의 눈동자는 예전의 강렬함을 잃었고 내 손을 잡고 흐느끼는 형수의 등 뒤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큰형님의 검게 그을린 두 빰 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물은 지난 세월의 회한을 담아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은 세상 고생 혼자서 짊어진 어머니를 병원 한번 데려가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고, 먹고살려고 산과 들에서 달빛을 벗 삼아 발버둥 쳤고, 곱디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갖은 고생으로 손발이 부르트게 하였다. 그래도 고생 뒤에 복이 올 것이란 희망으로 동생을 공부시켰는데 그 동생이 떠났으니 당신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했을까. 시골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큰형님은 모든 것을 청산하고 서둘러 대구로 이사를 왔다. 큰형의 결심과 실행을 전광석화 같이 이루어졌다. 1월 초에 형을 보내고 2월에 대구로 이사를 왔다. 비산동의 점포 딸린 좁은 집에 새를 들었고 형님은 군에서 배운 운전기술로 직업을 찾았고 형수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려서 살림에 보탰다.
형수와 나는 한주에 두 번은 만난다. 가슴 아프게도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어머니의 다낭성 신장병을 유전으로 받아서 지금은 혈액투석을 하고 있다. 같은 병원에서 투석 하고 있어 수요일과 금요일은 병원에서 만난다. 형수는 매번 나를 위해서 떡과 음료수를 챙긴다. 한번은 건너뛸 만도 한데 한 번도 빠뜨리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형수의 보호가 필요한 철없는 막내 시동생이다. 형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24시간 큰형님을 곁에서 함께 하고 있다. 병원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형수의 뒷모습을 볼 때가 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세련되고 멋진 뒤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참 곱게 보인다. 그러나 내면에는 수많은 시름과 아픔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도 당뇨와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남편을 돌보는데 소홀함이 없다. 창가를 바라보는 형수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간다. 두 팔을 내밀어 형수의 감싸 안는다.
깜짝 놀란 형수가 뿌리치고 뒤돌아본다. 막내 시동생을 확인하고 씨익~ 미소를 짖는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띠동갑 시동생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가슴속에서 눈물이 맺혀온다. 오늘도 형수는 자신의 삶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띠동갑 형수는 나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