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10월9일(주일) 구암성당 공동체 225명의 가족들이 해미성지를 다녀왔다.
아침 7시 대형버스 5대에 나누어 타고 성당을 출발하여 10시30분경에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22 '해미성지'에 도착했다.
성지에는 우리 성당을 비롯하여 대전월평동성당,서울대치4동성당,서울봉천3동성당,
의정부금곡Cu,인천월동성당, 광주문수동성당에서 참석한 1,400여명의 신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해미성지는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순교자중 최근까지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신 순교자는 교회측기록67명
관측기록65명과 무명순교자로 기록된 47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밖에 이름모를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순례에 참석한 1,400여명의 순례자들은 11시부터 야외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순례에 참여한 본당의 신부님과 해미성지본당 주임신부님(백성수시몬)의 주례로 엄숙하게
봉헌되었다. 느티나무잎의 가을맞이가 시작된 나무그늘 아래서 장엄한 미사에 참석한 1,400여명
신자들의 모습은 잠들어 있는 순교자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사를 마치고 본당에서 영상물을 관람하고, 박물관, 자리개돌,진둠벙,십자가의길기도,무명순교자의묘 를 둘러보고
우리는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해미읍성은 해미성지에서 차로 5분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호야나무'가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호야나무는 관청으로 끌어온 배교를 하지 않은 신자들을
집단적으로 나무에 메달아 목졸라 죽인나무이다.
해미읍성 관람을 마치고 오후 4시경에 해미를 출방하여 성당에 도착하니 7시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