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한자락

나의 베란다

쌍둥이가족 2021. 9. 15. 11:02

 

 

 

하루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은 우리 집 베란다에서 믹서커피 마시며 책을 보는 시간이다. 좁은 공간 안에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빨간 자전거가 있고, 삼각 빨래건조대에는 양말과 속옷들이 너부러지게 걸려있고, 캠핑용 안락의자 하나가 창가에 자리 잡고 있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고급 주택의 잘 가꾸어진 정원이 부럽지 않은 천연의 정원이 있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은 팔거천을 따라 금호강으로 흐르고 하천을 따라 말끔히 정리된 산책길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득하다. 소리 없이 지나는 지상철도 삶의 숨가쁨을 쉬어가려는듯 매천역으로 천천히 미끄러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 나가는 7시까지 이 멋진 베란다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본다. 찌그덕거리는 캠핑용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 줄의 책을 읽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면 왠지 모르게 행복감이 밀려온다. “너는 잘하고 있어, 그래 잘하고 있어, 너는 멋진 삶을 살고 있어내 안에 잠재된 열등감에서 탈출을 위한 자화자찬이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속물의 근성이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남들이 수년 전에 읽었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이다. 문화유산답사 기행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홍준 교수의 필력은 독자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 이상의 호기심과 재미를 제공해 준다. 유래와 전설 그리고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는 읽는 이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베란다에서 구워 먹는 김치 삼겹살과 소주 맛은 그 어떤 성찬도 부럽지 않다. 이 순간 부자간에 나누는 소주잔의 부딪침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남들처럼 야외로 캠핑가거나 멋진 리조트로 여행을 가지는 못하지만 좁은 베란다에서 즐기는 캠핑의 감성과 어둠 속에 내리는 별빛은 하느님 축복이다.

베란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 빨래건조대는 수령이 20여년이 되었어도 지금까지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 그 의리가 감복하다. 양말이며 속 옷들을 담당하는 녀석은 늘 내게 불만이다. 나는 쉬는 시간을 주지 않는 악덕 사용자다.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들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내지만 도무지 걷어낼 줄 모른다. 혼자 사는 편안함과 게으름은 옷 갈음을 건조대와 직거래 한다. 굳이 서랍장 같은 수납장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우리 집 빨래걸이는 건조대이면서 동시에 수납장이다. 부름을 기다리며 날렵하게 자세 잡고 있는 빨간자전거는 4대강을 함께 달린 동고동락 친구다. 천생이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성격이라 뜨거운 여름에 과감히 길을 나섰던 50대 초반이었다. 4대강과 섬진강 그리고 북한강 여행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백색의 벚꽃 길은 섬진강의 기억이요, 뜨거운 여름의 짙푸른 색은 낙동강의 기억이요, 오색의 황홀함은 북한강의 기억이요, 흐드러진 코스모스의 반짝임은 금강의 기억이요, 붉게 물든 노을의 가슴 벅찬 감동은 영산강의 기억이다. 지금도 빨간 자전거는 내 기분이 울적할 때면 어김없이 금호강으로 나를 이끄는 멋진 친구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빗방울을 머금고 있다. 선선한 날씨에 팔거천으로 사람의 발길이 잦아든다. 다정히 걸어가는 부부의 발걸음이 가볍다.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 옆으로 하얀 강아지가 여자의 손 끌림에 목을 젖힌다. 베란다 난간에 앉았던 비둘기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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