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발전 등 과학기술이 자연선택·돌연변이 등 진화의 매커니즘 제한
미래의 어느 날 지구. 인류는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돼 개인들이 서로의 의식을 공유하는 초의식 상태를 형성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한 우리의 후손들은 육체와 지구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의 몇몇 지성체들의 통합된 의식체인
'오버마인드'에 합류한다.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범우주적 종으로 진화한 것이다. 과학소설(SF) 작가 아서 클라크가 '유년기의 종말'에서
내다본 인류의 미래다.
이 같은 전망은 과연 SF의 허튼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지구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인류의 역사는 35억년
지구 생명체의 역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수백만년 동안 인류의 조상 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듯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와 또 다른 종으로,
아니 호모속이 아닌 다른 속으로 분류될 생명체로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과연 인간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 유전적 다양성 잃어가는 현대 인류
영국 런던유니버시티칼리지의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는 최근 "인류의 진화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생물의 진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무작위 변화와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이,
의술이 발전하고 아이를 적게 낳는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더 이상 인간 진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가 끝났다는 결론까진 아니어도 현대 과학기술문명사회가 인간의 진화적 환경을 크게 바꿔놓고 있다는
데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표적으로 치명적 유전자에 의한 자연도태 과정은 의술에 의한
도태로 대체되고, 지구촌 전체가 밀접히 연관되면서 인류 전체의 유전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100~200년 전만 해도 다른 인종, 다른 민족 사이에 자녀를 낳을 기회가 드물었지만
이제는 다양한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들을 보는 것은 예사다. 단일민족이라는 이상을 고집스레
주장했던 한국만 해도 국제결혼 비율이 13%를 넘어섰다.
이러한 유전적 교류는 새로운 유전자 풀이 도입되는 것이어서 국지적으로 보면 당장은 유전적 다양성을 높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유전적 다양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말한다.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고립된 공동체들이 남아나지 않고 전세계 남녀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인류 전체의
유전자가 서로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존스 교수가 말한 '무작위 변이의 감소'는 곧 이런 의미다.
존스 교수는 "모든 인종이 서로 뒤섞여 결국 (하나의) 갈색 인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인간-기계 결합 시대의 도래
과학기술의 발전은 또한 기계와 결합될 인간의 미래를 눈앞에 제시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30년 뒤면
컴퓨터를 접속할 수 있는 인공 두뇌를 통해 생각만으로 기계를 조작하거나, 신체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공달팽이관을 이식해 청력을 되찾고, 인공관절을 넣어 걸을 수 있게 된 이들처럼 앞으로
인공 뇌가 이식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테오도르 W 버거 교수는 수년 전 쥐의 뇌에 해마 부분을 대신할 수 있는
인공 칩을 심어 거의 정상에 가깝게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마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관문으로, 해마가 손상되면 새롭게 뭔가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옛날 일은 줄줄이 꿰어도 30분 전 밥 먹은 사실은 잊어버리는 치매환자를 떠올리면
인공 해마의 가치는 금세 드러난다. 완치법이 없는 치매환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줄
해마 이식수술을 (안전성만 보장된다면) 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해마뿐이랴. 불의의 사고로 척수가 끊겨 전신마비가 된 미국 청년 매튜 네이글은
뇌에 브레인게이트라는 칩을 심고, 전극에 컴퓨터를 연결, 생각만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TV를 켜거나 로봇팔을 움직여 물건을 집는다.
브레인게이트 개발자인 브라운대 존 도나휴 교수는 사이버키네틱스 뉴로테크놀로지 시스템스라는
벤처를 창업,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BCI) 상용화 시대를 알리고 있다.
뇌-컴퓨터 접속은 근본적으로 신경세포끼리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작동하는 뇌의 기능이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과 같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는
"뇌와 컴퓨터는 다른 언어를 쓰지만 적절한 통역기만 개발되면 호환이 된다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일단 치료 목적으로 도입될 인공뇌 이식은 '슈퍼 인간족'의 탄생이라는 논란을 잉태하고 있다.
뇌가 디지털 정보처리를 거쳐 신체에 장착된 인공물이나 주변의 기계들을 제어하면 빨리 달리고,
힘 세고, 멀리 보는 '600만불의 사나이'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 산하 국방첨단연구기획국(DARPA)은 슈퍼 군인을 만들기 위해 이 분야에 엄청난
연구비를 쏟아붓고 있는데 이런 기술이 더 능력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일반인에게 적용되지 말란 법이 없다.
■ 과학기술에 기반한 신인류의 출현
정재승 교수는 "BCI 기술은 유전되지 않는 특질이므로 진화적인 영향은 적을 것"이라고 보는 반면
인간-기계 결합이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과의 닉 보스트롬 교수는 뇌의 영역별 기능이 완전히 규명되고
이를 대체할 기술이 발전하면, 애써 수학이나 외국어를 배울 필요 없이 '계산모듈' '언어모듈' 등을
업로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황을 분석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관리모듈'을 업로드하면 단번에 치밀하고 계획적인 인간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보스트롬은 "생물적 뇌를 가진 현재의 인간은 업로드족과의 경쟁에서 밀릴 것이 뻔하고,
업로드족은 자신의 뇌를 복제하는 식으로 자손을 퍼뜨려 미래의 새로운 종으로 자리잡을지 모른다"고 전망하고 있다.
신서사이저 등을 발명한 특허왕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불과 1세기 후면 물리적 신체로부터
자유로운 세대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보스트롬의 예측과 비슷한 '소프트웨어 기반 뇌'를 가진 인간이
현재 우리와 같은 '뉴런 기반 뇌'를 가진 인간보다 많아지고, 그들은 육체가 필요하면 가상현실이나
나노봇을 통해 필요에 따라 만들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기술만이 아니라 생명공학기술 역시 인류 진화의 운명을 가를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의대 그레고리 스톡 교수는 "원하는 유전자들을 끼워넣도록 인공 염색체
한두 개를 배아에 삽입함으로써 인간을 재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3쌍의 사람 염색체에 포함된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보다, 차라리 켜거나 끌 수 있고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는
인공 염색체를 만드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 인류 진화, 그 우연한 필연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로 보면 이러한 미래 예측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적용과
보급은 기술이 없던 당시의 판단을 가볍게 뛰어넘곤 한다.
정재승 교수는 "성형수술로 몸값이 몇 배 뛴 스타들의 예를 보라.
처음엔 기형 환자에게 적용되는 의술이었지만 이제는 계급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느냐"며
"뇌 기능을 강화하는 기술도 신뢰성이 높아지면 현재의 가치판단이 어떻든 일반인이 소비하려는 욕구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인지과학협동과정 이정모 교수는 이 같은 변화의 시기를 인간 인식에 대한 새로운 전환기로 규정한다.
그는 "인류는 르네상스와 17세기 계몽시대를 거치며 비로소 하늘과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인식을 갖게 됐다.
이후 다윈 진화론은 인간이 동물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인식을 열어주었다. 이제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고, 인간 존재의 개념을 밑뿌리부터 재구성해야 하는 시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개미와 아카시아나무가 해충을 막아주고 먹이를 얻는 식으로 공진화해왔듯이 인간은 인공물과 공진화하는
미래를 맞게 된다는 전망이다.
지질학적 시간 단위를 넘어 천문학적 시간을 내다본다면 과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것은
인류의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기후변화, 소행성 충돌, 핵전쟁 등으로 야기될 수 있는
멸종의 위기를 용케 모두 피해간다 하더라도 생명의 근원인 태양의 수명을 연장할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청장년기에 다다른 태양은 앞으로 50억년 내에 적색거성으로 부풀어 지구를 삼켜버릴 것이고 인류는
그 전에 살만한 다른 행성계를 찾아나서야 한다. 인류가 단단한 기계적 하드웨어에 유전 정보를 담는 식의
완전한 개조를 겪지 않는다면 길고도 험한 항성간 여행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쯤 되면 지구의 지적생명체는 우리의 후손이라기엔 민망할 만큼 우리 예상을 벗어나 있으리라.
오래 전 어느 단세포 생물이 인간이라는 후손을 어디 예상했으랴.
다만 호모 사피엔스가 미래 지성체 존재의 토대가 된 과학기술문명을 일으킨 종으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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